2010. 4. 10. 12:40
|
시대의 양심을 깨우는 예레미야
<Ugly Truth>라는 영화가 있다. 번역하면 불편한 진실 내지는 추악한 진실 정도 되는 것인데, 여기서 주인공인 제레미 버틀러(300의 그 분이다)는 로맨스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남녀관계의 속물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까발린다. 더 얘기하자면 스포가 되니 알아서 감상하시라.
개인적으로 지식인들의 역할이란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고 더 나아가 대안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그리고 대중이 지식인에게 실망하게 되는 경우는 눈앞에 뻔히 보이고 또 겪고 있는 불편한 진실에 침묵할 때이다(더 나아가 달콤한 거짓을 찬양하여 공분을 사는 헤궤한 경우도 있다).
독재가 용인되는 경우는 칼이든 붓이든 무엇인가를 집고 싸우는 사람들이 없을 때이다. 한일합방의 충격적인 진실이 하나 있다. 소위 조선시대의 지식인 계층인 양반들(고위관료포함)의 80퍼센트 이상이 식민지 지배에 찬성하거나 침묵했다. 합방이후 실시했던 토지조사사업(조선의 토지를 일본의 소유로 넘기기위한 목적이있었다)에 적극 찬성하며 본을 보인것도 양반계층이다. 대부분 지주 출신이었던 그들이 자신의 소유지를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을 추진한 사람들의 주축은 왕족, 평민, 군관계자 들이다. 양반층의 활동이 없지는 않았지만 조선시대에서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놓고 봤을 땐 분명히 미약했다.
지부상소라는 말이 있다. '도끼를 지고 상소를 올리다'라는 뜻인데, 초야의 선비라 할지라도 지부상소는 왕이 가납해야만 한다. 상소는 어떨때 하는가? 사회가 잘 돌아가고 있을 때는 상소를 하지 않는다. 뭔가 불편한 진실이 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왕에게 간언하는 것이다. 도끼를 지고 왔다는 것은 상소를 들어주던지 지고 온 도끼로 내 목을 베던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하나의 자세가 아닐까?
조선의 관직체계중 청요직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왕과 일부 고위관료들의 독주를 막고자 설치한 관직으로,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들어봤을법한 대사간, 대사헌 등의 관직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정6품으로 정언_正言이라는 관직이 있는데, 문자 그대로 '바른 말을 하는 관직'이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정6품 나부랭이임에도 불구하고 삼정승을 탄핵할 수 있으며, 왕의 언행에 대하여 직언으로 상소할 수 있다. 정언을 비롯한 청요직은 1)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2)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며 3) 자신보다 관직이 높아도 옳은 말을 할 줄 아는 담력을 가진 사람을 임명한다. 그리고, 왕이나 인사권 담당인 이조에서 임의로 선발하지 않고, 추천제를 사용한다.
하지만 당파싸움이 극심해지고, 추천제를 악용하여 상대당파를 견제하기 위한 잘못된 목적으로 청요직을 채워나갔던 조선후기 이후로(무조건 상대당을 비난하는 대변인으로 격하된 것이라 보면 된다) 유명무실해졌다. 바른말(정언)소리가 왕의 귀에서 멀어지고 관료들의 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으니, 그 정치사가 매우 지저분하고 난잡한 것은 두말할나위 없지 않은가(조선후기 정치사를 조금 공부해본 입장으로, 이 시기에 발생한 역모, 독살, 암살을 비롯한 정치사건들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너저분한 면이 있다. 일례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정조는 데뷔해에 노론에서 보낸 자객의 암살시도를ㄷㄷ).
어느 나라나 잘못된 사회에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특히 현대사회에 들어서서는 언론이 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다면 건강한 사회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이감독님의 글에서 느낀바이지만 영화와 같은 영향력이 큰 미디어들이 은폐되고 있었던 불편한 진실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점수를 주고 싶다. 최근 <그린존>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2차 이라크 전쟁에서 불거졌던 여러 의혹들을 명료하게 제기하고 있다. 필자는 액션신보다 바로 그 점에서 점수를 더 주고 싶은 영화다(이라크 전쟁을 주도했던 부시의 퇴임후 오바마 정권때 개봉했다는것도 참 흥미롭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그 때 그 사람들>, <26년 후>, <화려한 휴가> 등등. 뭍혀지고 있었던 불편한 진실을 캐내었던 영화 혹은 만화들이다. <작은연못>의 개봉을 축하하며 시대의 양심을 깨울 수 있는 이런 영화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한다.
양심이란 날마다 확인하고 깨우지 않으면 그 위에 금새 두꺼운 먼지가 쌓여버린다. 신앙양심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날마다 신앙양심을 곶추 세우지 않으면 무뎌지기가 쉽상이다. 설령 우리가 죄악을 범한다 하지 않을지라도 세상속에서 죄악이 관영한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 안에서 우리 신앙양심과 영혼은 얼마나 통탄하는지 모른다.
J군이 디스랩을 하는 고등부 애들에게 랩으로 상대방을 깎아내리지말고 축복하라고 얘기했다는 것을 얼마전에 들었다. 바로 이런 것이 작게나마 양심을 깨우는 소리가 아닐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언행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바로 잡는 소리들. 세상이 불편한 진실을 그냥 인정하고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진리 안에서 잘못된 것이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먼저 느끼고 인정하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생명의 삶은 현재 예레미야서 초반을 달리고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그냥 아무런 준비 없이 보내신 것이 아니다. 첫째로 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히 근심하시는지 그 실상을 낱낱이 설명해 주셨고 둘째로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20살 애송이에게 문제가 무엇인지 확실히 인지시키신 것이다(개인적으로 - 진리는 아니고 상상임 - 문제인식을 하는 그 부분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도 제사장의 아들이었기에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겠지만, 하나님이 그 부분을 명확히 말씀하셨기에 더 확신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후로 남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예레미야가 불편한 진실을 성토하는 양심의 소리가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제사장도 서기관도 왕도 우상숭배에 대해 그려러니 하고 침묵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오늘 묵상구절 중 표준새번역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렘 3:5 '하나님은 끝없이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면서, 온갖 악행을 마음껏 저질렀다."
렘 3:10 이런 온갖 음행을 하면서도, 배신한 자매 유다는, 건성으로 나에게 돌아온 척만 하고, 진심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니 괜찮을꺼야, 이 정도 하면 되지 않을까... 필자의 신앙양심이 무뎌졌을 때 하나님께 실제로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말씀과 기도에 착념하고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날마다 회복해야 하는 이유다.
아, 단 5분을 묵상하더라도 건성이 아닌 진심으로 내 양심을 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기를. 시대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침묵하지 않기를. 불편한 진실이라도 열린 마음과 열린 귀로 들을 수 있기를. 우리가 거하는 각 처소에서 양심을 깨우는 하나님의 대변인이 될 수 있기를..
-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헤아리는 패스포트가 되기를 염원하며 -
기나긴 건기를 마친 종선 올림
개인적으로 지식인들의 역할이란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고 더 나아가 대안을 제시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그리고 대중이 지식인에게 실망하게 되는 경우는 눈앞에 뻔히 보이고 또 겪고 있는 불편한 진실에 침묵할 때이다(더 나아가 달콤한 거짓을 찬양하여 공분을 사는 헤궤한 경우도 있다).
독재가 용인되는 경우는 칼이든 붓이든 무엇인가를 집고 싸우는 사람들이 없을 때이다. 한일합방의 충격적인 진실이 하나 있다. 소위 조선시대의 지식인 계층인 양반들(고위관료포함)의 80퍼센트 이상이 식민지 지배에 찬성하거나 침묵했다. 합방이후 실시했던 토지조사사업(조선의 토지를 일본의 소유로 넘기기위한 목적이있었다)에 적극 찬성하며 본을 보인것도 양반계층이다. 대부분 지주 출신이었던 그들이 자신의 소유지를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을 추진한 사람들의 주축은 왕족, 평민, 군관계자 들이다. 양반층의 활동이 없지는 않았지만 조선시대에서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놓고 봤을 땐 분명히 미약했다.
지부상소라는 말이 있다. '도끼를 지고 상소를 올리다'라는 뜻인데, 초야의 선비라 할지라도 지부상소는 왕이 가납해야만 한다. 상소는 어떨때 하는가? 사회가 잘 돌아가고 있을 때는 상소를 하지 않는다. 뭔가 불편한 진실이 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왕에게 간언하는 것이다. 도끼를 지고 왔다는 것은 상소를 들어주던지 지고 온 도끼로 내 목을 베던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하나의 자세가 아닐까?
조선의 관직체계중 청요직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왕과 일부 고위관료들의 독주를 막고자 설치한 관직으로,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들어봤을법한 대사간, 대사헌 등의 관직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정6품으로 정언_正言이라는 관직이 있는데, 문자 그대로 '바른 말을 하는 관직'이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정6품 나부랭이임에도 불구하고 삼정승을 탄핵할 수 있으며, 왕의 언행에 대하여 직언으로 상소할 수 있다. 정언을 비롯한 청요직은 1)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2)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며 3) 자신보다 관직이 높아도 옳은 말을 할 줄 아는 담력을 가진 사람을 임명한다. 그리고, 왕이나 인사권 담당인 이조에서 임의로 선발하지 않고, 추천제를 사용한다.
하지만 당파싸움이 극심해지고, 추천제를 악용하여 상대당파를 견제하기 위한 잘못된 목적으로 청요직을 채워나갔던 조선후기 이후로(무조건 상대당을 비난하는 대변인으로 격하된 것이라 보면 된다) 유명무실해졌다. 바른말(정언)소리가 왕의 귀에서 멀어지고 관료들의 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으니, 그 정치사가 매우 지저분하고 난잡한 것은 두말할나위 없지 않은가(조선후기 정치사를 조금 공부해본 입장으로, 이 시기에 발생한 역모, 독살, 암살을 비롯한 정치사건들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너저분한 면이 있다. 일례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정조는 데뷔해에 노론에서 보낸 자객의 암살시도를ㄷㄷ).
어느 나라나 잘못된 사회에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특히 현대사회에 들어서서는 언론이 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다면 건강한 사회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이감독님의 글에서 느낀바이지만 영화와 같은 영향력이 큰 미디어들이 은폐되고 있었던 불편한 진실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점수를 주고 싶다. 최근 <그린존>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2차 이라크 전쟁에서 불거졌던 여러 의혹들을 명료하게 제기하고 있다. 필자는 액션신보다 바로 그 점에서 점수를 더 주고 싶은 영화다(이라크 전쟁을 주도했던 부시의 퇴임후 오바마 정권때 개봉했다는것도 참 흥미롭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그 때 그 사람들>, <26년 후>, <화려한 휴가> 등등. 뭍혀지고 있었던 불편한 진실을 캐내었던 영화 혹은 만화들이다. <작은연못>의 개봉을 축하하며 시대의 양심을 깨울 수 있는 이런 영화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한다.
양심이란 날마다 확인하고 깨우지 않으면 그 위에 금새 두꺼운 먼지가 쌓여버린다. 신앙양심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날마다 신앙양심을 곶추 세우지 않으면 무뎌지기가 쉽상이다. 설령 우리가 죄악을 범한다 하지 않을지라도 세상속에서 죄악이 관영한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 안에서 우리 신앙양심과 영혼은 얼마나 통탄하는지 모른다.
J군이 디스랩을 하는 고등부 애들에게 랩으로 상대방을 깎아내리지말고 축복하라고 얘기했다는 것을 얼마전에 들었다. 바로 이런 것이 작게나마 양심을 깨우는 소리가 아닐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언행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바로 잡는 소리들. 세상이 불편한 진실을 그냥 인정하고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진리 안에서 잘못된 것이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먼저 느끼고 인정하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생명의 삶은 현재 예레미야서 초반을 달리고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그냥 아무런 준비 없이 보내신 것이 아니다. 첫째로 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히 근심하시는지 그 실상을 낱낱이 설명해 주셨고 둘째로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20살 애송이에게 문제가 무엇인지 확실히 인지시키신 것이다(개인적으로 - 진리는 아니고 상상임 - 문제인식을 하는 그 부분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도 제사장의 아들이었기에 타락한 이스라엘의 실상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겠지만, 하나님이 그 부분을 명확히 말씀하셨기에 더 확신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후로 남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예레미야가 불편한 진실을 성토하는 양심의 소리가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제사장도 서기관도 왕도 우상숭배에 대해 그려러니 하고 침묵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오늘 묵상구절 중 표준새번역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렘 3:5 '하나님은 끝없이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면서, 온갖 악행을 마음껏 저질렀다."
렘 3:10 이런 온갖 음행을 하면서도, 배신한 자매 유다는, 건성으로 나에게 돌아온 척만 하고, 진심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니 괜찮을꺼야, 이 정도 하면 되지 않을까... 필자의 신앙양심이 무뎌졌을 때 하나님께 실제로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말씀과 기도에 착념하고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날마다 회복해야 하는 이유다.
아, 단 5분을 묵상하더라도 건성이 아닌 진심으로 내 양심을 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기를. 시대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침묵하지 않기를. 불편한 진실이라도 열린 마음과 열린 귀로 들을 수 있기를. 우리가 거하는 각 처소에서 양심을 깨우는 하나님의 대변인이 될 수 있기를..
-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헤아리는 패스포트가 되기를 염원하며 -
기나긴 건기를 마친 종선 올림
'김작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사펌]마리아노 리베라, 불멸의 마무리(Closer) (2) | 2010.04.23 |
---|---|
본격팩션포토스토킹일기 - 필리핀 김추노, 박동혁을 추적하다(3) (2) | 2010.02.26 |
본격팩션포토스토킹일기 - 필리핀 김추노, 박동혁을 추적하다(2) (3) | 2010.02.24 |
(J에게 헌사하는)아스널 이야기2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공격진 (1) | 2010.02.24 |
(J에게 헌사하는)아스널 이야기1 - 웽거와 아스널 (1) | 2010.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