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

[여행준비 3막] - 하서회랑_河西回廊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0. 29. 00:33
<중국 간쑤성[] 서부, 치롄[]산맥 북록에 동서로 이어져 있는 오아시스 지대 - 네이버 백과사전>

교역을 위해 장안에서 좋은 품질의 비단과 도자기 등을 싣고 먼 길을 떠나는 대상을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대상의 교역담당이든 통역담당이든, 호위무사든 험난한 사막길로 들어가기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서회랑입니다.

하서회랑의 지리적 특징을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문자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1) 하서_河西 : '하'는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황하를 의미합니다. 하서는 곧 황하의 서쪽지역을 말하지요.
2) 회랑_回廊 : 칸막이로 구획되고, 지붕이 있는 긴 복도형 구조물을 일컫는 건축용어입니다. 사원이나 궁전건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뭔소리냐? 하시는 분을 위해 회랑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창경궁 회랑입니다. 아마 고궁을 좀 다니신 분이라면 대충 어떤 형태인지 짐작이 가시겠죠?

여튼 하서회랑을 문자의 의미대로 해석한다면 - 황하 서쪽의 길고 좁은 복도 형태의 지형 - 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특이한 지형이 형성된대는 이유가 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하서회랑(그림의 하서주랑입니다, 하서회랑은 하서주랑 혹은 감숙주랑으로도 불립니다)은 북쪽으로 고비사막, 남쪽으로 기련산맥에 막혀서 자연스럽게 긴 복도형태의 지형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대상들은 장안(서안)을 출발하여 란주(혹은 난주, 지금의 간쑤성 란저우시)의 나루터에서 황하를 건넙니다. 그리고 하서회랑이 시작되죠. 하서회랑의 마지막 지점인 돈황을 지나면 본격적인 서역땅으로 타클라마칸사막 남북의 실크로드 기선인 서역남로와, 천산남로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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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련산맥입니다.

도자기에 비유하자면 하서회랑은 좁고 긴 입구에 해당되는 곳으로, 고대부터 전략적인 요충지였습니다. 다시말해, 하서회랑을 제압한다면 중국고대왕조의 입장에서는 서역과 직접교역이 가능해지고 더불어 북방의 기마유목국가를 압박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마유목국가가 하서회랑을 제압한다면 서역국가들과 중국의 경제외교적 연결을 끊고, 중국본토를 보다 쉽게 공략할 수 있게 됩니다.

하서회랑의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이 지역은 늘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만리장성입니다. 만리장성은 기마유목민들의 침략을 방어하기위해 세워진 장성입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명나라까지 지역별로 여러번 증개축되면서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지금 많은 관광객이 찾는 만리장성이 지금의 형태를 갖춘것은 명나라 시대입니다, 다른 시기의 것과 구분하기 위해 명장성이라고 합니다).

만리장성의 서쪽경계인 돈황의 옥문관_玉門關은 이미 한나라대에 설치가 됐습니다. 하서회랑이 장성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었던 셈이죠.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종합하자면 이렇습니다.
1) 하서회랑은 중국 -> 서역, 서역 -> 중국으로 출입할 수 있는 중요한 길이다.
2) 이 길을 차지하기 위해 중국고대왕조와 북방기마유목국가는 전쟁을 불사했다.

그럼 지금부터는 하서회랑을 구역별로 살펴보도록하죠.

1. 난주_
하서회랑에 진입하려면 반드시 황하를 건너야 합니다. 하서회랑의 시작점과 황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도시가 감숙성 난주입니다. 연 강우량이 500mm정도로 건조한 곳이지만, 도심을 관통하는 황하로 인해 관계농업이 발달했고 계획공업도시로 성장한 현대에도 황하가 공업용수 및 생활용수로 사용되고 있는 그야말로 황하의 혜택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난주에 있는 황하모친상입니다. 황하강변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죽기 직전 나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라는 의미에서 만들었다는데, 정말인지 모르겠네요ㅋㅋ. 황하가 난주에게 베푼 풍요함을 생각해볼 때, '어머니 = 황하'라는 공식을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양피화자_羊皮筏子입니다. 양가죽에 바람을 불어넣어서 나무틀과 함께 단단히 고정시키면, 훌륭한 부력을 갖춘 뗏목이 완성됩니다. 난주의 나룻터에서 황하를 건너고자 했던 고대인들의 주요한 운송수단이죠. 갑자기 소창자나 염통에 바람을 불어넣어서 공놀이를 했다는 우리네 할아버지의 옛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난주를 표표히 흐르는 황하입니다. 꼭 집중호우때의 한강을 보는 것 같네요.

2. 무위_武威
황하 건너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하서회랑. 다음 기착지인 무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기련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그 고개가 바로 오초령_烏鞘嶺입니다. 해발 약 3500m의 고갯길을 넘으면 평탄한 초원지형이 나타나는데, 목축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입니다.

오초령은 중국고대왕국의 전략적 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원의 거의 유일무이한 목장지대이기 때문입니다. 몽고가 일본을 침략하기 위하여 고려 제주도를 전략적 목장으로 선택하고, 군마를 육성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오초령의 넓은 목장지대가 담당한 것입니다. 즉, 서역에서 수입된 야생마들이 오초령에서 군마로 거듭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초령 사진은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여드릴 수 없네요. 아쉬워라ㅠ.ㅠ


전 포스트에도 설명을 드렸지만, 말에 대한 한족국가의 집착은 대단합니다. 그림은 무위의 한나라 묘(장군직으로 추정)에서 출토된 청동분마상인데요. 아마 세계사 시간에 배운 분도 있을 듯 하네요. 말을 상당히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의 오른쪽 뒷다리가 밟고 있는 것은 제비입니다. 그래서 이 청동상을 마답비연_馬踏飛燕이라고도 합니다. 나는 제비를 밟고 뛰쳐나가는 '제비보다 빠른 말'인 셈이죠.

서역은 고대로부터 훌륭한 말 생산지였습니다. 훗날 포스트하겠지만 장건은 한무제의 명(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서역의 월지국과 동맹을 맺는 것)을 받들어 서역행을 감행하지만 월지와의 동맹에 실패합니다. 대신 금싸라기같은 정보를 얻어오는데요. 바로 한혈마_馬의 존재입니다. 땀을 피같이 흘리고,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서역의 훌륭한 말!

기동력에서 월등한 흉노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군마가 필요했습니다. 장건이 가져다준 정보는 한무제가 서역경영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지요. 결국, 서역경영의 결과로 하서회랑에 한사군이 설치됩니다(무위 - 장액 - 주천 - 돈황). 하서회랑이 중국사에 편입되는 순간이지요.

전한 시대의 유명한 장군인 곽거병의 묘에 있는 마답흉노상입니다. 곽거병이 탔던 천리마가 흉노왕을 짓누르고 있는 형상이죠. (내용이 녹록치 않기 때문에)흉노와 한나라의 전쟁에 대해서는 후에 포스트 하겠습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절대적인 전공을 세운 장군의 묘에 저런 상징적인 석상이라니요. 말과 서역 그리고 흉노와 한나라를 아우르는 치열한 다툼의 현장을 한 무武제가 무武위로 명명한 것은 우연이 아닌 듯 싶습니다. 

하서회랑은 고대중국과 기마유목민의 투쟁의 현장입니다.

3. 장액_
무위와 마찬가지로 하서사군 중 하나입니다. 무위를 지나서 있구요. 마르코폴로가 장액을 서방에 '칸피추'라고 소개했다네요. 그 덕분인지 장액에는 지금 마르코폴로상이 있습니다(사진은 못구함 gg).

4. 주천_
당나라 후반부부터 실크로드의 주도권은 기마유목민으로 넘어갑니다. 돌궐, 토번, 서하, 몽고 등이 하서회랑을 제압했죠. 덤으로 중앙아시아에서는 이슬람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실크로드의 통상권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의 실크로드 간선을 정복하기 제압하기 시작한거죠.

쿠데타로 세워진 명나라는 중화의식의 회복을 바탕으로 조공무역 형태의 외교정책을 실시합니다. 기본적 쇄국에 부분적 교역이랄까요. 북방의 몽고족은 사막을 건너 초원지역으로 쫓겨났고, 세력이 크게 약화됐습니다. 서역은 급속도로 이슬람화 되고 있었죠. 명나라는 원나라처럼 대단위 교역과 상업무역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즉, 명나라는 나라의 사활을 걸고 서역과 실크로드를 점유할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서부국경의 안정화를 위해서 하서회랑을 확실히 제압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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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로 사진에서 보는 가욕관을 세우게 됩니다. 주천이 하서회랑에서 제일 좁은, 곧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기도 하고 가욕관도 방어에 특화된 시설이 많습니다. 명나라 시기이 축조된 만리장성(명장성)의 서부 경계는 가욕관입니다. 그리고 가욕관은 이슬람화된 서역국가를 방어하는 전초기지였습니다.

가욕관의 축조는 명나라 스스로가 서부경계를 가욕관으로 규정지었다 것과 동시에 서역경영을 포기한 것을 의미합니다. 가욕관에서 방어한다는 것은 하서회랑에서 서역으로 들어가는 제일 중요한 도시인 돈황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가욕관은 명나라 쇄국정책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5. 돈황_
하서회랑에서 제일 서쪽 변경에 위치해있으며, 본격적으로 서역에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전초기지입니다. 사실상 유목민족이 세운 중국왕조(원, 청)이 아닌 한족이 세운 왕조의 제일 서쪽에 있는 국경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한족문화와는 다른 이질적인 타국문화가 많이 유입되고 융화된 곳입니다.


막고굴입니다. 천불동이라고도 하는데, 석굴형식의 불교사원입니다. 중국은 한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석굴형식의 사원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석굴사원은 황하연변에 위치한 경우가 많은데요. 이는 황하유역의 황토층이 착굴(굴을 팜)하기에 굉장히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막고굴도 동일한 지형조건이구요. 반대로 한국(일본의 경우는 잘 모르므로 패스)에서 어느정도 규모를 갖춘 석굴사원이라면 경주의 석굴암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은 굴착이 용이한 점토층은 흔하지 않고 대부분 암석층인 까닭입니다. 석굴암은 화강암 지대를 굴착해서 만들었으니, 그 노력은 물론이거니와 기술력이 상당한 셈이죠. 막고굴에 꿀릴거 없습니다ㅋㅋ

막고굴에 대해서는 본편의 포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간단히 살펴보자면, 남굴과 북굴로 구성되있고 남굴에는 불상과 벽화가, 북굴은 승려나 화가(벽화)가 거주하던 장소였습니다. 벽화중 일부는 페르시아나 그리스, 혹은 인도풍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인됩니다. 돈황을 오가던 다양한 민족들의 문화가 어우러진 것이죠.

17호 굴(장경동이라고 불립니다)에서는 이른바 '돈황문서'로 불리는 다양한 고문서들이 발견이 됐습니다. 그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있었죠. 돈황문서의 발견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냐면, 이의 연구를 위해 '돈황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돈황문서에 대한 얘기와 더불어 서양열강들의 실크로드 약탈에 대한 부분도 본편에서 포스트하겠습니다.


돈황의 두 관소 중 하나인 양관_입니다. 보통 양관을 거쳐서 서역남로로 진입을 했었는데, 급속한 사막화로 서역남로가 폐쇄되면서 점점 쇠퇴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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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의 또 다른 관소인 옥문관_關입니다. 서부변경의 변화에 따라 옥문관의 위치도 약간씩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나라 때 처음 축조되었고, 현재 유적지로 남아있는 것은 당나라대의 것입니다. 보통 옥문관을 통해서 천산남북로로 진입했습니다.

돈황의 의미는 '크게 성하다'입니다. 하서회랑의 끝자락이자 서역의 진입지점에 세워진 돈황에 대한 한무제의 기대가 정말 컸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백성을 이주시키고, 둔전을 실시하면서 서역경영의 전초기지로 가꾸어갑니다.

다음편에서는 실크로드의 간선(서역남로, 천산남로, 천산북로)을 살펴보고 바로 본편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평안한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