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만 단편 릴레이

릴레이소설 1~10

jo_nghyuk 2009. 11. 13. 12:33
1 (조매희)


 오늘이다.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오늘이다. 10년만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 그래, 그 날이 오늘이다. 묘하게 들뜬 자신을 본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 자꾸 히죽거리고 있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만원 지하철 안에서도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10년 동안 마음 저 편에 가라앉아 있던 그 시절의 빛나던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든다. 현재가 그 시절의 연장선상에 있고, 아직도 그녀와 자신 사이를 이어줄 무언가가 남아있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자꾸 고개를 든다. 하루종일 멍하니 있다가 결국 상사에게 뒷통수를 맞았지만 그래도 좀처럼 헤어나올 수가 없다.

 사실 벌써 3년이나 사귄 여자친구가 있다. 평탄한 연애가 몇이나 되겠나만은, 지겹도록 싸우고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는 관계, 지금도 며칠 째 냉전중이라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이젠 그저 악연처럼, 그저 얽혀서 차마 헤어지지는 못하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꾸, 멀어지고 무뎌지는 마음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여자친구도 그런 마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했다. 이번이, 어쩌면 이번이 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붕 뜬 상태로 퇴근시간이 가까워 왔다. 이미 마음은 그녀에게로 가고 있었다. 정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전화가 왔다. 여자친구이다.

[...]

-나야.

[어.. 그래.]

-나.. 할 말이 있어. 오늘 좀 만나.



2 (장종혁)


, 사실 오늘 약속이 있어. 오래된 친구야.

 

- 친구?

 

, 중학교 동창.

 

여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해본 적은 많지 않다. 그런데도 목소리는 태연했다.

거짓말을 하는 순간에도 적잖이 스스로에게 의외였다. . 너 이런 면도 있구나, 하는 마음.

 

- , 그래.

 

이런 식이다. 어지간히 지적이고 시크한 데다가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의 쿨한 성격의 소유자. 그래서 어떨 때는 나라는 사람 자체에 무관심해 보인다. 사실 그런 면이 사귀기 전에 내 마음을 애걸복달하게 했지만, 만난 지 일년이 지나면서부터는 그런 쿨함보다는 오히려 가족 같은 자상함이 나는 아쉽고 그리웠고, 계속해서 3년을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했던 것도 그런 요소가 일조했다.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해, 라며 전화를 끊었다.

싫었다. 언제나 예측한대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부정적인 상황이 나는 너무 혐오스러웠다.

이렇게 관계를 계속 지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3년 동안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불안정한 플롯 자체가 치명적인 관계의 단면이라고. 나는 생각해왔었다.

 

질질 끌려 다니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것은 점액질 기질의 네 우유부단함 때문이다.’

파스텔 톤으로 뿌옇게 흐려져 하늘색과 회색만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법한 흐리멍텅한 건물들의 풍광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압구정 역을 향하는 전철이 한강 대교 위를 지나고 있었다. 현재의 여자친구를 만나며 부쩍 혼잣말이 많아졌다. 대화라고 나는 지문을 던졌는데, 상대방이 대사를 받지 않으면, 그것은 다시 나에게 돌아와 쓸쓸한 독백이 된다. 이를테면 테니스 서브를 던졌는데 상대방이 받지 않고 벽에 맞고 돌아오게 된다고 하자. 그럼 서브를 던진 사람은 계속해서 그것을 받아 칠 수밖에 없다. 말을 걸고, 서브를 걸고 하는 행위는 자신의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벽에 서브를 넣기 시작한다. 옆에서 보면 그가 스쿼시를 치고 있다고 할 것이고 혼잣말을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 감정이 없는 듯한 대답처럼 공이 되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튕겨져 나오는 공의 각도와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역은 압구정, 압구정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언제나 예측한 대로 정확히, 왼쪽 방향으로.

 

 

3 (장종혁)


그러니까 그 노인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개념 없는 청년에게 소리를 뿌악뿌악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사실 귓속에 팽이버섯처럼 이어폰을 매일같이 재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청년의 모습이 늙은 나무에 단단히 붙어 기생하는 버섯같기도 했다.

 

그리고 전동차가 갑자기 멈추었던 것이다.

와르륵, 레고 블록처럼 사람들이 쏟아졌다. 그 중에는 이 노인도 있었는데 버섯청년은 아직도 제 자리에 붙어있었다.

 

거긴 네 자리가 아니야

 

이상하리만큼 화가 뻗쳤다. 녀석을 치우고 노인을 그곳에 앉히고 싶었다. 그 자리는 오래된 사람의 것이었다. 나는 평균 이상의 잦은 시선으로 녀석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공공장소에서 쏘아보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 - - - - *

 

현재의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다.

 

거긴 네 자리가 아니야 오래된 사람이 있어

 

가방 속의 핸드폰이 계속 진동했다. 숲 속의 매미처럼. 이상도 하지,

숲 속에서 매미를 발견해놓고도 잡기를 꺼려하는 사람처럼

나는 보류 버튼을 눌렀다.

 

'그래, 다음에 말하자.' 

 

열차가 한강을 지나면서 모호하고 희끄무레한 건물과 대기의 혼합물을 뒤편으로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 속에서는 어느 정도의 정리가 끝난 기분이었다.

강 저편에서 이편으로 넘어오는데 10년이 걸렸구나.’

 

나이를 먹을수록 사랑의 의미는 점차 무거워진다. 젊었을 때의 사랑이 수채화라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물감은 유화를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덧칠하면 찢어질 정도로 마음의 종이가 젊을 때에는 연약하긴 하나 오히려 여러 페이지가 있어 페이지를 북 찢을

여유와 편의도 누릴 수 있는 반면 나이가 든 사랑은 망각이 아닌 유화의 덧칠에 가깝게 된다. 즉 서투르게 감정의 종이를

상하게 하는 일은 없으나, 그 위에 계속해서 덧입혀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망각한 것이 아닌, 덮어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시작될 때는 가슴에 퍼지나 끝날 때 그것은 위장에 퍼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두려워 페이지를 찢어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       - *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쯤 문자가 왔다.

 

  

다시는 연락 하지마

 

 

 

김민주

010-7727-3787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멈추었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수동으로 내 다리를 써야 해서가 아니라, 에스컬이 수동으로 그 성질이 완전히 다른, 이를테면 기계에서 건축이 되어버리는 수준으로 비약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멀미가 났다. 또 고장이구나. 더 먹먹한 것은 내 자신이 그런 자동적인 시스템에 길들여져 너무도 수동적인사람이 되어버려 고장난 에스컬레이터에-다르게 말해 계단에 면역력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계단이 길고 낯설고 무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땅을 잃은 인디언들이 환승역 문화센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4 (조매희)



밖으로 나가니 햇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어째서? 나는...

나는 이미 그녀를 놓지 않았는가.

그녀와의 끈은 이미 오래전에 잘려버렸다, 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뿐인데, 이건 이기적인 마음이다.

그래도 그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껍데기조차 남지 않은 아무 것도 아닌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그녀는 아니길 바랐던 것인가.

자기연민인지, 자기혐오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이유인지 알지 못 할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발걸음을 멈춘채 고개를 숙여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렸다.

 

이것은, 내가 지켜내지 못한 마음을 슬퍼하는 것이다.

끝까지 같은 마음이라 더 아파했던, 이젠 쓰지 못할, 우리라는 이름의 너와 나를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아쉬움 속에서도 결코 널 잡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매정함에 대한 경멸이다.

 

모처럼 일찍 도착한 보람도 없이 정해진 약속 장소로 향할 수 있게 됐을 땐 이미 약속 시간에서 10분은 지나 있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내가 찾는 사람은 없었다.


5 (장종혁)

 

역시 그녀는 오지 않았다.

어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다.

그녀가 오지 않을리 없다.

그리고 후대의 평론가들은 그것은 '그녀가 오지 않을 것'을 그 시구가 더욱 역설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분석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인은 참 처량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플라톤이 말하듯 불가능에서 가능을 보는 "미친 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이다.
셰익스피어는 미친 자들, 시인들, 그리고 시인들이 이러한 것을 보고, 바라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제정신으로 어떻게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고 바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더 우스운 것은, 젊은 베르테르가 여기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오지 않을리 없다.

그리고 오지 않는다.

그녀는 피아니스트였다. 봄의 왈츠를 연주하는 사랑스러운 여대생이었다. 한 번은 그녀의 발표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그녀의 정숙하고도 공손한 몸가짐이 인상적이었고, 누구보다도 두드러지는 그녀의 터치가 나를 사로잡았었다.
그 부드러운 동선은 그녀의 가녀린 등에서부터 출발하여 허리와 어깨의 큰 두 줄기로 나누이고, 허리로 간 한 흐름은 페달을 정기적으로 밟는 그녀의 버터플라이같은 다리에서 끝나고 어깨로 간 한 흐름은 바람이 왈츠를 추는 듯한 모양으로 양 팔을타고 우아하게 배분되어 건반을 두드리는 열개의 타점으로 끝을 맺는다. 특히 그녀의 다리는 오른손과 왼손이 만드는 음표들이 자유롭게 콘서트홀을 활공할 수 있도록 가장 적합한 타이밍에 꼭 필요한 날개짓만을 하는 나비처럼 정확한 순간에 페달링을 하며 음표들을 띄워주고 있었다.

그녀의 가녀리고 섬세한 그 터치는 그해 봄부터 나의 심장을 타건하고 있었다.


 

6 (조매희)


오지 않을리 없던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오지 않는다. 그녀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지 않을리 없는 그녀는..
내 관념 안에 있는 그녀에 대한 판단이 틀렸음을 확인하고 있다. 어쩌면 모든 것이 나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오지 않을리 없다. 그래서 난 이 장소를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맞는 해답인 것인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내게 어울리는 해답을 찾으면 그만이다. 나는, 오지 않을리 없는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에 대한 회상이 나를 이 거리에서 그 때로 불러들였다. 나는 이 곳에 서 있지만, 껍데기뿐인 나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내 의식이 이 곳을 떠난 동안, 난 이 거리의 배경이 되어버렸다. 그대로 저 멀리 가버리려는 의식을 잡은 건 전화기 진동음이었다. 내 전화기에서 울리는 진동음. 그녀였다.

 [미안. 미안한데 오늘은 못 갈 것 같아. 전화로는 그렇고 다음에 만나면 꼭 설명해줄게. 미안.]

 입을 열어야 한다. 뭐라도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나는 그녀의 말 단 한마디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 환상 속의 그녀가 지금 존재하는 현실의 그녀보다 내게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환상, 혹은 내 과거의 기억 속으로 잡아 놓은 그녀에 대한 상념. 무엇이라고 하든 그녀는 오지 않을리 없다. 그러나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 아니, 오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는 그녀. 아니다, 그녀는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닐 것이다. 내가 알았던,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역시 오지 않을리 없던 그녀는 오지 않는다. 무엇인가 나를 어지럽힌다. 현기증이 일어 휘청거리며 걸음을 떼다 망설인다. 오지 못할 것 같다는 그녀의 음성이 다시 들린다.

 [다음에 만나자. 미안해. 다음에 다 설명해 줄게. 여보세요? 듣고 있니?]

 더 들을 수가 없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더 들어줄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난 왜 그녀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을까. 그녀를 몰아세우는 말도, 안심시키는 말도, 어느 쪽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날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언가 날 참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리게 만들었다. 

......내가 알던 오지 않을리 없던 그녀는 이제 존재하지 않아요......


 

7 (장종혁)

 

나는 이런 식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고 그것이 소극적인 거절이라는 것을 과거의 거절의 경험들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설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이제는 더이상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이미 내 쪽에서 방어적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이것은 정중한 거절인거지.

전화를 끊은 것이 미안해서 문자를 보냈다.

그래, 알았어
다음에 보면 되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역시 나를 만날 마음이 없는 것일까. 핸드폰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압구정 인파속으로 나는 삼켜진다. 철저한 타인들에게 둘러싸인다. 무표정하게 서로의 얼굴을 문득 쳐다보고는,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너도 잠시 내 존재를 문득 응시하고는 내 등 뒤로 물러가버리는 한 사람인 걸까.

누구를 만나도 똑같은 걸까. 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공허해졌다.

붕- 붕 -- 붕 --


어디냐?
나 강남역인데
윤식이랑 영남이
같이 있다.
한잔 하자.


진구 녀석이다. 너희들끼리 마셔라. 난 술 못 마시잖아.


시끄럽고 빨리 오기나
해라. 있다가 영혜랑
채은이도 오기로 했어.
간만에 동창끼린데 짜샤


-_- 알았어


"강남역이요"
"네"
도저히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낯선 이들의 이산화탄소를 마실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혼자 있고 싶은데. 하지만 택시는 목적지에 나를 실어다 나르는 중이다. 창 밖을 보면 도시는 하나의 열을 내는 집적회로 같았다. 하드웨어처럼 빌딩들이 촘촘히 박혀 있고 건물마다 자신의 고유기능을 수행하며 발열한다. 이 한 겨울에도 도시가 더운 것은 이때문이다. 건물도 건물끼리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 이를테면 수산시장 주변에는 생선집들과 식당들이 몰려 있으며 방산시장 주변에는 세라믹 공장들이 몰려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 혈관과도 같은 도로의 노선들을 통해 사방으로 풀려져 나가는 것이다. 피가 각 영양분들을 몸의 기관들에 전달시키는 것처럼. 헤드라이트와 백라이트들이 백혈구와 적혈구처럼 굴러가는 도시. 도시는 위장처럼 사람들을 흡수하고 혈관같은 도로로 사람들을 각 기관으로 배출한다. 그러나 나는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제 곳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운전기사는 라디오를 '주관적이게 적당한' 볼륨으로 틀어놓았다. 나는 아이팟을 꺼내 귀에 꽂고 볼륨을 최대로 올렸다. 처음에는
Tahiti 80의 wallpaper for the soul이었으나 그들의 음악은 그야말로 송대관씨의 보컬에 비해 희미한 벽지처럼 들리는 바람에
Sound providers의 Who am I?로 음악을 바꾸었다. 한참 뒤 기사가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 같았는데 내가 왼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자 기사가 어디서 내리냐고 세번째 묻고 있는 중이었다. 송대관 아저씨가 이번에도 Sound providers의 음악을 벽지 삼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뉴욕 제과 앞이요" 혹시나 그가 더 말을 시킬까봐 한 쪽 이어폰을 뺀 상태로 앉아 있었다. 나는 둘 중의 어느 음악도 듣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무언가 또 말할 것만 같아서 이 두 음악을 그가 다음에 내뱉을 문장의 벽지로 만들어놓고 조심스레 대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8 (장종혁)


어 왔구나, 녀석. 오랜만이다

진구 녀석은 여전하다. 각진 안경에 제법 살집이 있는 체구. 큰 몸집을 지녔음에도 안경 속의 날카로운 눈빛과 섬세한 지성을 지니고 있던 녀석이었다. 학교에서 일명 비주류라 불리우는 조용한 소집단의 파편들 중 녀석도 하나였지만 녀석과 대화하다 보면 금세 그의 큰 몸집만큼이나 내면의 정신 역시 거인임을 쉽게 알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무심하게 이 거인의 등 뒤로 지나가며  생각할 뿐인 거다. ‘뭐 좀 아나 보네

나는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가 흐르는 호프 집 안에 있다. 진구 옆에는 영남이와 윤식이가 있었다. 나는 소극적으로 진구 녀석이 그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까지 진구와만 대화하고 있는다. “알지? 욱이. 동창이었잖아” “, 그래 야 오랜만이다.” 어어, 그래 나는 웃으며 인사하지만 예전에 길에서 영남이를 봤을 때 머뭇거리다가 모른 척 지나쳤던 순간이 생각나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욱아, 넌 요즘 뭐하니?” 윤식이가 나에게 물었다. 친구들에게 듣기론, 윤식이는 작은 컴퓨터 게임 회사에서 일하지만, 4년째 월급 80을 받고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70, 지하철 택배 아르바이트 생이다. “그렇구나, 야 그거 힘들다고 하던데나는 힘들지만 열심히 뛰면 100에서 120까지 벌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 달째 되는 지금, 내 체력은 바닥이고 수당제인 이 시스템 안에서 나는 그다지 능률적이지도 못하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할 수 없었다. 영남이는 환경 감찰부에 있다고 했고, 다음달에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 진구 녀석은 작은 NGO관련 신문사에서 일하다가 저번 달에 사장이 잠수를 타서 월급을 못 받고 저널리스트에서 백수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어 채은이 왔다, 영혜는?” “, 한시간 정도 늦을거래. 야근이 있어서채은이는 나와 함께 영문과를 다녔고 지금은 기업은행에 취업해 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 욱이네. 안녕. 참 오랜만이다그래, 나는 머쓱하게 얼음물을 마신다. “욱아, 너 대학원 간다면서. 지금 다니고 있니? 학부 조교하면서 다니고 싶어했잖아그랬지, 나는 컵에서 입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교수님이 널 참 좋아하셨었는데. , 참 너 혹시 미래 소식 알고 있니?” 나는 입에 있던 얼음을 컵에 빠뜨렸다. 그녀는 미래의 친구였다. 과는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의 비슷한 취향 덕에 자주 연극이나 연주회를 보러 가곤 했었다.

 

미래?

 

 

나는 무심한 척 다시 뱉은 얼음을 입으로 삼켰다. 미래와 만나기로 했었던 소실된 오후가 생각나서 자꾸 얼음을 깨물기만 했다.

 

잘 모르겠는데. 뭐 하는데?

 

 

아 너 잘 모르는구나. 미래 내일 독일 간대. 나도 오늘 들었어, 추가 합격이 되었는데 시간이 촉박한가 봐

 

 

Don' look back in anger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녹은 얼음이 내 입가에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9 (조매희)


침을 삼킨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 잠깐 눈을 감았다 뜬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마치 취한 듯 어지러움을 느낀다.

 

"정말 잘됐지 뭐야. 그 동안 애태운 걸 생각하면.. 아, 너희 연락 안한지 오래됐지?"

 

 오늘 만나기로 했었다-는 이야기는 삼켜버리고 대신 애매한 대답으로 마무리 했다.

 

 "아, 어.. 그렇지 뭐."

 

 나는 내가 끊어버린 그 통화를 떠올렸다. 그녀의 절박한 목소리-아니, 그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내 안에서 다시 많은 것이 각색되기 시작했다-가 들리는 것 같다.

 

 [미안. 미안한데 오늘은 못 갈 것 같아. 전화로는 그렇고 다음에 만나면 꼭 설명해줄게. 미안.]

 

 리플레이, 리플레이.

 

 [다음에 만나자. 미안해. 다음에 다 설명해 줄게. 여보세요? 듣고 있니?]

 

 미안. 미안해. 미안해.

 

 반복, 반복.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해버린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였던 것일까. 나의 이기심은 아무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고, 무엇도 배려하지 못했다. 그저 나 좋을대로 생각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만이 떠오른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려서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나는 자꾸, 백일몽을 꾼다. 아아, 그녀에게는...

 순간, 통화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다.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그녀는 내일, 독일에 간다.'

 

 퍼뜩, 생각이 스쳐간다.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시간은 나만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리라.

 

 -다음에 만나면.. 다음에..

 

 그녀는 언제 나를 만날 생각이었을까. 내일 독일로 떠나는 그녀에게, 다음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는 말이긴 했을까. 시간이 모든 것을 퇴색시켜 버렸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모든 지나간 것들은 그 상태에서 의미가 있고 아름다운 것이라고-들춰내 현재로 끄집어내면 빛바랜 추억은 추해질 뿐인 것일까.

결국 그녀에게도 나는 그 만큼의 의미 밖에는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에게의 그녀처럼-

 

 "야, 야. 너 뭐해. 저기 좀 봐."

 

 진구가 강하게 나의 옆구리를 쳤다. 그로 인해, 난 현실로 불려오게 되었다. 진구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낯익은 여자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한심해하는 눈빛인지, 놀라는 눈빛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민주씨 맞지? 근데.. 너희 싸웠어?"

 

 진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래도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그녀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나 역시 그녀를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가, 왜, 지금, 이곳에 있을까.


10 (장종혁)


민주는 껌을 씹고 있었다. 욱을 보면서. 아니 그를 본다기보다는 그와 그녀 사이에 놓인 어떤 공간의 틈 속을 주시하고 있었다고 해야 옳다. 그녀는 하얀 껌이 보일 정도로 입이 살짝 열린 상태로 멍하니 어떤 생각을 곱씹으면서 그 공간의 틈새로부터 무언가를 지긋이 끄집어내려고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입 안에서 그 하얀 물체를 계속해서 돌리고, 뒤집고 잘라내었다가 다시 이어붙이는 등 형태를 계속 변형시켜가면서 자신의 추리를 진행시켜나갔다.

곧이어 어떤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다.

 

 

미래.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녀는 다시 멀건한 표정으로 욱을 바라보았다. 제 삼인이 봤다면 그것은 그저 무심한 표정일 따름이지만 (자리에 앉은 윤식이와 진구를 포함해서) 그녀의 감정변화가 그녀의 표정에 어떠한 인풋input을 넣는지 그동안 적지않은 경험을 한 욱이로서는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직감을 갖춘 채은으로서는) 오히려 그것이 매우 복잡한 심경이 되었을때에 그녀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불협의 코드chord같은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어서와, 빨리 앉어. 상황이나 심경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윤식이와 진구가 민주를 자리에 앉혔다. 민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에 앉아 웃으며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미래 소식 들었어? 독일 간대. 윤식이가 먹던 사과 반토막을 마저 입에 넣으며 끊어진 화제를 이어갔다. 사정을 잘 아는 채은은 윤식에게 눈치를 주려고 노력했지만 무신경한 윤식이는 입안의 사과를 질겅질겅 씹어넘기며 민주의 대답을 들으려 민주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 그래? 어머, 잘 됐다, 얘. 그래서 언제 간다는데? 욱이는 도무지 그 자리가 불편했다. 매일 습관성 이별을 하는 사이라 이런 자리는 냉전상태 속에서 여럿 치러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녀와의 동석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적당히 표면을 꾸미고 아무렇지도 않은척 하고 있으면 되는 문제다. 하지만 그가 거슬렸던 것은 이런 관계의 깨어짐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람들과 떠들어대는 그녀의 심경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티격태격해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였다. 나는 가까스로 불편한 감정을 누리며 그나마 포커페이스를 지키고 있는데 그녀는 뭘까. 아무렇지도 않은걸까. 하고 생각하니 상대적인 소외감과 함께 더욱 화가 치밀었다. 욱은 자신이 상대적인 약자라고 생각하며 이 무리가 아닌 창 밖의 군상들을 바라보거나 컵에 담긴 얼음의 형태라든지 컵의 무늬를 위축된 마음으로 관찰하며 점점 이 그룹의 대화에서 변방으로 멀어지게 된다. 그래, 항상 이러한 패턴이었다. 그녀는 중심에 있고, 나는 주변부에 뒤떨어지게 된다. 민주가 더 크게 웃으며 재밌게 떠들수록 욱의 고독감과 소외감은 더 증폭되었다. 그녀가 화제를 주도하고 거센 농담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을수록, 욱은 점차 더 대화에 끼기가 힘들어졌다. 진구가 욱에게 물었다. 야, 무슨 말이라도 해라. 넌 물만 마시러 여기 왔냐? 아니, 난 이게 더 편해. 욱이 대답했다. 이쯤이면 거의 궤도를 이탈해서 욱은 대화가 아닌 다른 것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주변부의 것들. 조용히 한사람 한사람의 생김새를 훑어보고 그의 머리가 곱슬인지 검은 큰 뿔테 안경을 꼈는지 셔츠의 무늬가 몇 겹의 체크인지, 신발이 아디다스 수퍼스타인지 컨버스인지, 각 사람의 어투와 문장, 그가 제스쳐를 크게 사용하며 대화하는 인물인지, 주로 조용히 경청하는 인물인지, 얼굴을 자꾸 찡그리는 사람, 자주 머리를 긁으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있는 사람, 주도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수동적이고 우유부단하게 따라가는 사람은 누구인지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대화에 낀 인물들은 모두 2인칭으로 이 대화에 참여하고 있지만 욱 자신은 계속해서 관찰자로서 이 대화의 밖에 위치하고 점점 그 자리를 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한다. 나는 이제 이 대화에 낄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내가 어울리기 싫어서도 아니고, 내가 무정해서도 아니며, 그냥 이 위치로서의 역할이 편안하고 나름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내가 대화의 주변부로 밀려난 것에 대해 폭력적이라고 그것을 느꼈다면 이제는 이제와서 나를 자신들끼리 진행시키던 대화의 후반부에 어거지로 참여시키려 하는 것에 대해 폭력성을 느낀다. 욱은 주변부로 밀려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어떠한 새로운 시각의 다양한 층위가 열렸음을 깨닫고, 그 이후로는 굳이 대화에 끼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필요한 순간에만 문득문득 자신의 할 말을 그 대화 속에 삽입시키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며 그 그룹 속에 있는 법을 익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 그룹도 욱이 그러한 궤도를 자기 나름으로 잡았음을 느끼고 욱의 다소 멀지만 선회해서 돌아오는 그 긴 주기에 맞추어 드문드문 대화하는 방식을 수용해주었다. 그러나 단 한사람, 대화의 중심부의 권력을 잡은 민주만은 그것을 아직도 용납하지 못하고 있었다.